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유럽 혁명 (문단 편집)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rague czechslovakia november 27, 1989.jpg|width=100%]]}}}|| || {{{#000,#fff [[프라하]] 바츨라프(벤체슬라우스) 광장, 1989년 11월 27일}}} || [[프라하의 봄]]이 실패한 이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과 같이 동구권에서도 손꼽힐 만큼 억압적인 통치[* 물론 인접한 [[폴란드 인민공화국|폴란드]]나 [[헝가리 인민공화국|헝가리]]에 비해 그랬다는 거지 동구권에서도 유별나게 폭압통치를 펼쳤던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루마니아]]나 [[알바니아 인민 사회주의 공화국|알바니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를 단행했다. 이 같은 억압은 1989년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순순히 물러난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나 [[헝가리 인민 공화국|헝가리]],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불가리아]]와 달리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동독]]과 마찬가지로 정권을 쉽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11월 10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와중에도 [[구스타우 후사크]](Gustáv Husák) 대통령과 [[밀로시 야케시]](Miloš Jakeš) 서기장은 정치 개혁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몇 주도 안되어 반전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주일이 지난 [[11월 17일]]부터 [[프라하]]와 [[브라티슬라바]]를 중심으로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고 11월 20일에는 프라하 중심에 있는 바츨라프 광장에서만 무려 '''20만명'''이 운집한 대규모 비폭력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으며 결국 여기에 굴복해 24일 야케시가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시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5일에는 이것의 4배가 넘는 '''80만 명'''이 몰려들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 무혈 시위에 의해 정치개혁을 완고하게 거부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도 굴복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벨벳 혁명'''(신사 혁명)이다. [[11월 28일]] 공산당은 다당제 도입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정치 개혁을 선언했으며 [[12월 10일]] 대통령인 후삭까지 사임했다. 이에 따라 시민 운동 세력이 급부상하기 시작했으며 극작가인 [[바츨라프 하벨]]이 차기 지도자로 물색되었고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에 의해 강제로 사임당한 전 서기장 [[알렉산데르 둡체크]]도 21년만에 다시 정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12월 28일]] 둡체크가 연방 의회 의장에 선출되어 공식적으로 정계에 복귀하고 다음날 하벨도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6월 자유 선거가 실시되어 몇 달에 걸친 벨벳 혁명은 막을 내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정권은 완전히 몰락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둡체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일 정부 구성 협의에 실패한 체코와 슬로바키아 양측은 결국 1993년 1월 1일에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하는 소위 '벨벳 이혼'을 실행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